김수환 추기경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이야기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빛난 가장 높은 사랑,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에게 남긴 감동적인 4가지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이야기


당신은 오늘,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어 보셨나요?

사실 대부분의 날엔 그렇게 쉽게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바쁘기도 하고, 힘도 없고, '저 사람도 별생각 없겠지' 싶어서 그냥 휙 지나칠 때가 더 많아요. 저 역시 그렇고요. 그런 순간마다 괜히 마음 한 켠이 묵직하게 남기도 해요.

저한테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진 건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분의 이야기가 진짜로 마음속에 들어온 건 한참 나중이었어요. "사랑은 내가 먼저"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너무 쉬운 말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오히려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짧은 한 문장 안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다 담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라는 타이틀보다도, 그분은 무료 급식소에서 줄을 서서 옆에 앉은 노인과 소박하게 밥을 나눠 먹던 분이었어요. 군사 정권의 공권력 앞에선 "나를 먼저 밟고 가라"고 했던 분이고, 마지막엔 자신의 각막까지 남겨 다른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셨죠.

사실 이 글을 통해 그분의 위대함만 떠받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분이 남긴 삶의 이야기 덕분에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소소한 물음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거든요.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살아갈 건지, 내 곁의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말이에요.

이 글, 부디 천천히 마음 열고 한 번 읽어봐 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김수환-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바보 같아서 가장 위대했던 사람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던 분, 혹시 기억나시나요? 한국 가톨릭 역사상 첫 추기경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으셨으면서, “나는 그냥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에요”라며 손사래를 치곤 하셨어요. 처음엔 다들 그냥 겸손의 말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곁에서 지켜본 분들은 정말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추기경님은 정말로 무언가를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았어요. 뭔가를 기대하지도 않았고요. 제일 약해 보이는 사람 곁에 제일 먼저 달려가셨거든요. 어떤 이념이나 정치 이야기, 이런 것들이 추기경님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어요.


김수환-추기경-이야기


1. 각막 기증, 죽어서도 남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이유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뒀던 유언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각막 기증이었죠.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죽어서도 눈물 흘리는 이 곁에 있고 싶으니까.”

추기경님의 진심이 딱 느껴지는 말 아닐까요? 실제로 그분의 각막은 두 사람에게 전해졌어요. 한 사람은 잃었던 빛을 다시 만났고, 다른 한 분은 비록 몇 달 뒤 세상을 떠나셨지만 추기경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추기경님의 눈은 또 다른 두 사람의 삶과 맞닿게 된 거죠.


2. 명동성당의 밤, "내 시신을 넘고 들어오라"

권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은 사랑

1987년, 한국은 정말 뜨거운 한 해였어요.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던 시위대와 그들을 막으려는 경찰이 명동성당을 두고 팽팽하게 대치했죠. 시위대 수백 명이 성당 안으로 뛰어들어 피신했고, 경찰은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누구나 "공권력이 곧 안으로 들어오겠구나" 싶은 분위기였고요.

그 긴박했던 밤, 김수환 추기경님이 마당에 조용히 나섰어요. 그리고 경찰들에게 한마디 건넸습니다.

"이 안에 들어오려면, 먼저 나를 넘어가야 할 것이오."

추기경님 앞에는 사제들이, 그 뒤로는 수녀님들이 순서대로 섰답니다. 경찰도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죠. 그날 밤, 공권력을 멈춰 세운 건 법이나 무기가 아니라 한 노인의 결연한 눈빛이었던 거예요.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죠. 두려움보다 더 큰 건, 바로 우리 앞의 누군가를 모른 척하는 그 마음 아닐까요?


두려움


3. 무료 급식소의 한 노인이 그랬대요. "당신도 여기 오시오?"  

추기경이라는 높은 자리에도 있으면서, 그분은 늘 쪽방촌이나 무료 급식소에 자주 발걸음을 했어요. 대단한 행사도, 수행원이 따르는 것도 없이 말이에요. 그냥 조용히 노숙인들 사이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곤 했답니다.

언젠가는 서울에 있는 무료 급식소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추기경님이 조용히 줄을 서 있는데,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슬쩍 쳐다보며 물으셨대요.

"당신도 여기 오시오? 아이구 잘됐네, 나도 혼자 먹으면 심심했거든."

그때도 추기경님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어요. 그냥 "예, 저도 혼자라서요"라며 나란히 앉아 밥을 드셨답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밥을 두 그릇이나 드셨다네요.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었어요"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추기경님의 삶에서 '나눔'이란 강단 위에서 하는 설교가 아니었어요. 묵묵히 줄을 서고, 이름을 감추고, 한 사람으로서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것—그게 바로 그분만의 나눔의 방식이었죠.


4. 옥에 갇힌 아들을 위해 찾아온 어머니 이야기

1970~80년대, 한국 사회는 정말 이념의 칼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어요.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 심지어 목숨까지 좌우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그 와중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나는 그가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아픈가, 배고픈가, 그것을 봅니다."


어느 날이었어요. 운동권 학생의 어머니가 부은 눈으로 추기경을 찾아왔대요. 아들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해요. 

당시 그 학생은 ‘국가 전복’ 운운하는 무서운 누명을 썼고, 웬만해선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않으려 했던 분위기였죠.

그런데 추기경은 조용히 어머니 손을 덥석 잡으면서 물었다고 해요.

“아드님이 올해 몇 살인가요?”

“스물셋이요.”

추기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대요.

“스물셋. 그 나이에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그 믿음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만큼은, 이 눈물이 다 증명하고 있어요. 그건 틀림없잖아요.”

이후로 추기경은 직접 탄원서를 써서, 그 학생이 조금이라도 선처받을 수 있게 힘을 보탰다고 합니다.


김수환-추기경-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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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에요. 그런데 어릴 때 가톨릭 계열 유치원을 다녔고, 수녀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지냈던 덕분인지 성당이라는 공간이 왠지 가깝고 익숙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가끔은 가톨릭 친구 따라 성당에도 놀러 가보고, 명동 성당도 여러 번 가봤어요.

근데 여러분, ‘사랑’이란 말 들으면 거창하게 떠올릴 때 있지 않으세요? 꼭 무슨 큰 희생이나 대단한 헌신이 있어야 진짜 사랑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할 때가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랑을 보면, 전혀 달랐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행동, 예를 들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모습, 이런 게 그의 사랑이었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작은 행동들 안에도 사랑이 숨어있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 출근길에 스치듯 건넨 인사, 피곤해 보이는 동료에게 슬쩍 커피 한 잔 내미는 일, 또는 바쁜 하루 중에라도 잠깐 멈춰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마음을 전했던 그 순간... 이런 것들이 다 사랑 아닐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 한 번쯤 먼저 손 내밀어 보면 어떨까요? ‘괜찮아?’ 하고 먼저 물어보거나, 잠깐 미소 지어주거나—정말 평범한 작은 행동이요. 사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그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오늘 누군가에게 먼저 작은 손길을 내밀어 주길 살짝 기대하면서요.